1. 의미그림이론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어떻게 언어가 세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른바 그림이론(Picture Theory)에 의해서 이를 설명하는데, 그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언어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그림이며, 그러한 한에 있어서 언어는 의미를 갖는다”
  

세계  ---

사태(사실)

---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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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문장(명제)

---  이름


 그는 먼저 그림과 세계의 관련방식(양자 구성요소들간의 대응관계,구조 동일성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이 방식을 언어에 적용함으로써 언어가 세계의 그림임을 논변한다.
 
“그림 속에 있는 요소는 세계 속에 있는 대상에 대응하고, 그림 속에 있는 요소의 배열은 실재하는 대상의 가능한 배열에 대응한다. 문장은 이름을 포함하고, 이 이름이 세계 속에 있는 대상에 대응하며, 문장 속에서 이름의 배열 역시, 세계 속에 있는 대상의 가능한 배열에 대응한다. 따라서 그림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나타내듯이, 언어 또한 그림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언어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그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실재를 표상할 수 있으려면, (문장이 사태[가능한 사실]를 표상할 수 있으려면) 문장과 사태 사이에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문장과 문장이 표상하는 사태가 어떤 공통적인 구조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문장은 가능한 사실에 대한 일종의 그림과 같은 것이 된다고 보았다.

My Comment

 (나중에 그 자신이 비판하듯이) 문장만이 사실을 표상하는 의미의 단위는 아니다. 그의 후기 언어이론인 '언어게임이론'에서 잘 드러나듯이 말의 의미는 “낱말을 사용하는 우리의 방식”에도 있다.
   
 그의 '의미그림이론'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것으로는, 그의 단편적인 언어관을 꼽을 수 있다. 비크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의 본질적 기능은 세계의 기술에 있고 또, 언어의 의미있음은 바로 세계의 표상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언어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호, 낱말, 문장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기능 또한 다양하다. 그의 '의미그림이론'은 언어(기호,낱말,문장) 자체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지시대상을 갖는 낱말을 모델로 하여 모든 종류의 언어의 유의미성을 해명 하려한 것이고, 언어의 기술적 기능(desciption)만을 유일한 본질적 기능으로 간주함으로써, 우리의 다양한 언어사용을 보지 못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나, 아름다움, 선함과 같은 가치대상은 물론, 그의 '그림이론'에 따르자면 “보여질 수는 있어도 말하여 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유의미성이 오로지 세계에 대한 표상에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미 그의 '그림이론' 안에서, 언어는 그림과 같은 것이 아니면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틀 안에서만 이해되어지는 언어는, 가치세계에 대한 언급이 이미 불가능하도록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그의 일면적인 언어 이해로부터 그의 '의미그림이론'이 출발했다고 보며, 결국 우리의 다양한 언어사용에 대한 인식 후, (그 자신에 의해서도) 그의 초기 언어이론은 비판받게 되는 것이다.

    2. 언어게임이론

 언어게임이론이란 언어가 외적 세계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게임과 같은 인간공동의 활동이며, 말의 의미 역시 말과 대상의 상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에 있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물!”이라는 말은 그 말의 발언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목마를 때나 화재발생시, 또는 화학실험의 경우 “물”이란 말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이는 마치 유사한 <공놀이>이지만 각기 다른 규칙 속에서 진행되는 야구, 축구, 농구 같은 게임을 생각할 때와 비슷하다)

 이러한 그의 이론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언어의 의미를 그 언어의 다양한 사용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과 언어가 일종의 게임과 같은 것이기에 (즉, 다수의 참여와 그 게임의 규칙준수가 전제되기에) 언어에는 공공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마치 놀이를 하듯이 (진지하게 그러나 이것을 의식하지는 못한 채로) 하나의 활동을 하는 것이며, 이것은 언어가 우리 삶의 한 형식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말의 의미를 논할 때, 언어의 형식적인 구조보다는 실제적인 활동문맥이, 불변의 대상적 세계보다는 삶의 형식이 초점이 된다. 즉, 한 진술의 참·거짓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행위가 주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언어활동의 다양성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를 언어활동 자체를 떠나서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다양한 게임들을 통해 이들의 공통된 규칙을 찾지 못하고 다만 가족과도 같은 유사성만을 발견하듯이, 언어활동 역시 그 자체를 벗어난 상태에서 그 의미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한, 언어활동은 다수가 참여하며 다수가 합의한 규칙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언어란 일종의 집단 게임이다. 즉, 언어는 그 게임의 성격상 공공성을 띈다. 이러한 논의에서 “언어게임의 최종적인 정당성은 그 게임의 집단적 실천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 또한 그의 이론에서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My Comment

 
그러나 그의 언어게임이론에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중 하나는 <진리 문제와 관련하여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겠느냐>하는 것과, 또 하나는 <말의 의미를 과연 그 말의 사용으로만 국한해서 규정 지을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다양한 언어게임이 각자의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특정방식을 실천하는 문맥체계이기에 그 진리기준은 특정문맥에 종속된 상대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아래의 논문을 참조: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실천방식을 인간의 원초적인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실천방식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면에서 보면, 진리는 상대적일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여러 상이한 언어게임 속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모든 언어게임들에 앞서 그것들의 바탕을 이룬 자연적 사실들이 있다고 보며, 이것 위에 원초적 언어게임이나 일상언어들이 먼저 세워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유 및 지식의 최종기반은 의심 또는 시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보편적 실천양식들이다.” 이좌용,「진리성의 기반에 관한 소고」)

 한편, 크립케의 논의에서도 보여지듯이 낱말들의 유의미성 문제는 그것들의 사용의 관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와의 관련도 고려되어야만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죽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이 의미있게 사용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실재했던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고유명사는 고정지시어>라는 크립케의 견해를 따르자면, 고유명사가 언어의 일부인 한에 있어서 그것이 인간에 의해 사용될 때 의미를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의 유의미성 문제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 즉 실재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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